(에세이쓰기) 일상의 낱말들 #1.커피- 내게 강 같은 커피
살랑~ 창밖으로 바람이 산뜻한 9월 아침이었다. 낮에는 더워지겠지만 아직 이른 이 시각의 시원함을 품은 공기에서 이제 뜨거운 여름은 한발 물러났구나 생각했다. 그날은 학교 인근 뒷산을 낀 큰 공원에 현장체험학습을 나가기로 한 날. 이른바 "어린이 작가 되기" 첫 수업이었다. 창작이라는 것이 콩깍지에 꼬투리 열리듯 툭!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 시작이 한없이 어려운 암흑처럼 느껴질 때도 있기에 그 시작을 쉽게 열어주고 싶어 마련한 작은 현장 학습이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반쯤 흘겨뜨고 졸졸졸 물을 받아 인덕션 불을 켜고 드륵 드륵 드르르르륵 커피콩을 갈았다. 조금씩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냄비에 보글보글 물방울이 솟아오르는 걸 보면서 필터를 두 번 접어 드리퍼에 끼웠다. 핸드밀 뚜껑을 열었더니 두둥! 은은한 커피 향이 공간을 채운다. 배송받은 지 며칠 안되어 향이 가장 좋은 2주를 아직 벗어나지 않은 콩이 뿜어내는 향과 기운이 내 주변을 솜사탕처럼 감싼다. 가루가 날리지 않게 조심조심 필터에 부었다. 그 사이 끓어오른 물을 알라딘 램프처럼 생긴 드립 포트를 활용하여 쫄쫄쫄 부었다. 처음엔 콩만 적시고, 30초 정도 기다리면서 부풀어 오르는 머핀을 바라봤다. 부우우욱 부풀어 오르다가 급기야 뽁~ 하고 머금고 있던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모습을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보다 한결 짙어진 커피 향이 좋다. 오늘 현장 학습 전에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다가 딸들을 깨워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일단은 모닝커피를 마시는 이 시간의 고요가 좋아 잠시 후로 미뤘다. 뱅글뱅글 물줄기가 커피로 변신하여 다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길 2번,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었다. 창가에 앉아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침. 새롭게 도착한 아침을 흠뻑 느끼며.
뜨거운 커피가 식어가면서 그라데이션처럼 시시각각 달라지는 커피 향을 실컷 즐기고 한잔 더.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여 한 잔 더 내렸다. 두 번째 커피는 미리 얼음을 넣어둔 텀블러에 가득 채웠다. 아이들이 열심히 활동할 때 숲에서 한 모금 마셔야겠다 생각하며.
학교에 도착하니 들뜬 표정의 아이들이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해맑게 웃고 있다. 오늘 따라 바람이 한결 상쾌한 것은 기분 탓일까. 하늘이 더 파랗게 느껴지도록 하얀 구름 몇 조각이 흘러가고 있다. 안전 규칙, 오늘 우리가 할 창작 과정에 대한 설명, 모둠 아이들끼리의 분업을 이야기하고 콩닥콩닥 출발했다.
5분 정도 지나니 콧등에 땀이 송골 맺힌다. 바람이 시원한 것 같아도, 햇볕은 뜨겁다. 아직 9월 초인 것이다.
"선생님, 간식 먹어도 돼요?"
"선생님, 물 마셔도 돼요?"
그럼, 그럼. 그럼 좋아. 마셔, 먹어. 하며 큰 길을 건너 숲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아이들보다 내가 더 신이 났다. 긴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며 걷는 여자 아이의 웃음소리는 더없이 듣기 좋았고, 잡기 놀이를 하는 남자아이들의 장난스러움도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우리는 학교를 벗어나 공원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며, 차나 오토바이가 다니는 안전이 걱정되는 길이 아닌 잔디밭과 보행자 전용 도로를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는 푹신한 길을 향해 걸었다. 걸을수록 더웠지만 종아리에 닿는 가방의 냉기가 시원해서 좀 덥다 싶을 때는 살짝씩 가방을 내 쪽으로 더 붙이고 걸었다. 예쁜 아이들과 쨍한 날씨를 기념하기 위해 걸으면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도 흔들림 없는 완벽한 사진을 수집할 수 있었다. 나이가 제법 든 웅장한 나무와 뒷산, 하늘만이 렌즈에 잡히는 구도에서는 아이들에게 감탄의 한 마디를 날리기도 했다.
"이야, 여기 풍경 정말 멋지지 않니? 어디 외국에 나온 것 같아. 우리나라도 날씨가 좋으면 이렇게 하늘이 예쁘구나. 우리 정말 날 잘 잡았다, 그렇지?"
풍경이 아니라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 잠시 멈춰 섰다.
"여기 서봐, 여기 구도 정말 예쁘다 사진 찍어줄게."
"네!!" 하며 내 뒤를 바짝 따르던 여자아이들 셋이서 팔짱을 단단히 끼고 하나가 된 채 나무 앞에 쪼르르 달려가 포즈를 취한다.
그때 갑자기 한 남자아이가 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생님, 그런데 물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요."
"어디?"
"선생님 가방에서요."
"어, 그래?"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진 찍느라 잠시 멈춘 내 아래 작은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러고 보니 걸어온 길에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물방울을 흘리고 왔네. 이게 뭐지? 아니, 설마?! 가방에 물은 없었던 것이다. 당황한 내가 급하게 가방을 열어제낀 순간! 나를 반긴 것은 <내게 강 같은 커피>였다. 가방 안에 온통 고여있는 커피와 홍수 위에 떠다니는 생활용품들처럼 둥둥 떠있는 볼펜과 메모지. 베이지색 파우치는 비스듬히 물에 잠겨있었다. 꺼내면 사선으로 베이지와 커피색으로 톤온톤 무늬가 생길 판이었다.
즉시 가방을 뒤집어 모든 물건을 바닥에 쏟았다.
아이들 앞에서 체면도 없이 가방 속 물건들이 세상 밖에 나와 뒹굴고 있었다.
"야, 우리 선생님 큰 일 났어. 가방 속에 커피 쏟아졌어."
"선생님, 물티슈 빌려드릴까요?"
"이게 물티슈로 되겠냐. 누구 화장지 있는 사람 없어?"
"화장지 버리게 비닐 봉지 있는 사람 있으면 좀 줘봐!"
흩어져 조금씩 뒤처져 걷던 아이들까지 한달음에 내 곁에 모두 몰려들었다. 부끄럽고 황당한 나보다 더 침착하게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내 가방을 처리하고 있었다. 아침에 급하게 커피를 챙기느라 텀블러의 마지막 똑딱 소리를 확인하지 못해서 고무에 틈이 살짝 벌어졌고, 두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방을 한 번도 열지 않은 동안 커피홍수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야, 선생님 명품가방 어떡하냐.?"
6학년 아이들은 흰 실내화에 샤넬, 루이비똥, 에르메스 마크를 그리고 명품 실내화라고 웃곤 했다. 아이들은 내 가방의 상표를 알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루이비똥 가방 어떻게 해요? 이거 얼마예요?"
"선생님도 몰라, 선물받은 거라서. 근데 괜찮아. 하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괜찮지 않은 내 마음. 이거 나한테 무척 소중한 건데... 유일한 명품이란 말이다. 그래도 애들 앞에서 너무 부끄러워서 조금이라도 속상하거나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얼른 대충 처리하고 다시 출발했다.
숲에 도착하고 모둠 별로 각자 필요한 사진 자료를 촬영하기 위해 흩어지고, 나는 그제야 벤치에 가방 속 모든 물건을 다시 꺼내어 뒷 처리를 시작했다. 파우치를 열었더니 그 안에는 작은 호수가 생겨있었다. 립스틱과 핸드크림이 젖어있고 뚜껑을 열어보니 핸드크림 뚜껑 틈새에도 커피는 침투해 있었다. 아, 액체의 집요함이라니. 흘러 흘러 어떻게 이 틈으로까지 흘렀을까. 파우치 안에 들어있던 지갑을 열어 카드를 모두 꺼냈다. 한 공간에 들어있던 여러 장의 카드가 한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카드와 카드를 붙여준 풀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커피. 한 장 한 장 물티슈로 닦아 다시 정리했다. 행정실에 제출해야 할 학교 카드 영수증이 아직 내 지갑에 들어있던 것이 기억나 부리나케 열어보니 커피 묻은 부분은 글씨가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있는 글자도 젖은 게 마르면 지워질 기세라 일단 사진으로 증거를 남겼다. 사진이라도 제출해야지. 다행히 총액은 비교적 선명하게 프린트가 남아있었다. 한 시간쯤 흐르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아이들과 창작 작업을 마무리하고 돌려보낸 후, 가방을 뒤집어서 흐르는 물에 빨았다. 루이비통 가방이 진짜 가죽이 아닌 인조가죽인 게 다행인 건가. 이렇게 막 다뤄도 되는 건가. 어디 세탁을 맡겨야 하나.. 고민하며 가방을 창가에 널어두었다. 젖은 가방이 햇볕을 쬐며 쉬고 있었다. 물건을 놓고 간 한 아이가 교실에 들러 햇볕샤워를 하고 있는 가방을 보고 말한다.
"선생님, 가방 빨으셨네요? 아까 저도 진짜 깜짝 놀랐어요."
"아니야, 괜찮아."
최대한 밝게 인사하고 아이를 보냈다.
아, 그 커피가 라떼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내 취향이 라테에서 아메리카노로 바뀐 것이 얼마나 다행인 것인가. 가방을 열면 아메리카노의 고소한 냄새가 난다. 커피의 신 맛과 고소함이 뒤섞인 마른 커피 냄새를 맡으며 그날의 유난히 파랗던 하늘을 기억한다. 이젠, 내 사랑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면 그날이 기억난다. 매일, 링거 수액을 맞듯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중히 들이켜며 그날의 하얀 구름도 한 조각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