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기

사랑의 꿈-손보미, 문학동네

히파티아햇살 2023. 5. 18. 19:09

2023년에는 나에게 주는 선물로 <문학동네 북클럽>에 가입했다. 

북클럽에 가입하면 8개월간 매달 2권씩 '이달 책'을 선정하고, 함께 읽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 첫번째 책이 사랑의 꿈.

젊은 작가상 최다 수상자라는 수식어를 가진 손보미 작가는 신춘 문예 등에서 이름을 여러 번 봐서 친숙한 이름이었지만 읽어본 작품은 없는 작가였는데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이달 책을 주문했다. 문학 동네 함께 읽기 챌린지인 독파 챌린지도 신청하고, 이달책 스티커도 모으고.. 아주 선생님이 주시는 스티커 모으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심정으로 읽는 첫 이달 책, 손보미의 사랑의 꿈.

 

사랑의 꿈은 단편집이었다.

밤이 지나면, 불장난, 사랑의 꿈, 해변의 피크닉, 첫사랑, 이사. 여섯편의 단편이 모여 한 권의 책을 이루었는데 책은 제법 두툼하여 400페이지에 육박한다.

각 단편마다 소녀가 나오는데 성장소설같기도하지만 어린애스러운 대사나 행동보다는 어린아이 속에 자리한 고독과 어두움이 그대로 녹아난 치밀한 심리묘사는 뭔가 께름칙하면서도 지난 어느 날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이런 생각을 나는 똑같이 하지 않았는데도 이야기 속 주인공이 나인 것 같아서, 언젠가 나에게 이런 날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 읽고 나니, 작품 속 십대 소녀들은 나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지만 그녀들의 갈망과 목마름, 불안함이 무언지는 모두 이해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설령 어느 장면은 내 인생에 전혀 일어나지도 비슷한 사건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이 시작되면 바로 몰입했고 소녀의 감정을 따라 가다보면 불안불안하다가 또 갈등이 해소되기도 했다.

 

 

<불장난>

무언가를 주입할 때 외숙모의 표정은 진지하고 열성적이었다. 몰입. 나는 외숙모의 표정에 완전히 넋을 잃곤 했다. -p.17

이전 장면들의 묘사부터 읽다가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외숙모의 표정이 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엄마는 말로 내뱉을 수 없는 생각이라면 머리와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양심이라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모든 것이 부스러지듯이 망가지던 시기와 엄마가 내게 “우리 공주님, 언제 어른이 될래?”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증오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이 같은 공간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를 정말로 매혹시켰던 것은 내가 금지당하는 대상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접근 금지 딱지가 붙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 딱지를 ‘그런’ 세계가 아닌 나 자신에게 붙여놓았다는 것.
평정심. 양우정은 그걸 유지할 줄 알았다.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닌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못했다. 나는 그런 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타고나는 여자들이 있고 그들은 선택받은 존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불길은 허공에서 살아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에 내가 열기에 열기를 더한 거라고,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공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 그 장면은 눈앞에서 선명하고 집요하게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그 세계는 터무니없이 치명적이고 통렬하면서 동시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해서 내 마음속에 꼭꼭 새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생각은 시간이 흐른 후에 착각, 기만, 허상에 불과하다는 판명이 날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착각과 기만,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자 효용이 될 것이다. 

 

 

<사랑의 꿈>

그래, 그녀는 딸을 떠나고 싶었다. 그 당시 그녀는 절대로 ‘딸을 버린다’는 표현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건 자기기만이나 허영심, 혹은 죄책감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아, 물론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를 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지금 미친 짓을 하려는 거야. (…) 어떤 사람들은 그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절대 멈추지 못한다. 아니, 자신이 하려는 일이 진실로 미친 짓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 일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이 그 일을 완성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그녀는 그걸 알 것 같았다

 

 

 

<해변의 피크닉>

“아무래도 난 별로 예쁘진 않은가봐요.”
“외모에 신경쓰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꼭 예뻐질 필요도 없어.”
나는 어머니가 내게 손쉬운 거짓말을 했다고, 어떤 것들을 숨기려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약. 건너뛰는 것. 그건 어머니의 신념이 작동하는 방식이었고, 단순한 눈가림이나 위장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어머니의 세계에서 때때로 어떤 진실들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런 식의 건너뜀이 필수불가결했다.
나는 나중에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내 외부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의 핵심에는 허영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내가 가장 필요하다고 느낀 것, 갈급하게 열망한 것은 나 자신이 어리고 어리숙한 여자아이가 아니라는 그의 승인이었다. 그가 나를 보고 감탄하고 나에게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과를 하고 나는 용서를 한다. 하지만 그가 도대체 내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어머니의 말마따나) 누구도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지만, 그게 곧 모든 사람의 삶이 공평하다는 의미는 아니리라고.

 

 

<첫사랑>

"너도 알아둬. 광활한 자연이 마음의 안식을 줄 수 있어."
그녀가 뭘 알겠는가?...그가 왜 광활한 자연을 돌아다녀야만 했는지, 그의 인생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그런 걸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 건 비밀이야.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돼.”
나는 그와 새끼손가락까지 걸었었는데! 그 순간,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내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붙들 수 있는 딱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와의 신의를 선택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그와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ㅇ르 소유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쪽을 선택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그 사실을 사방팡방으로 떠들어댈 것이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공백을 포함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엄마가 복층 아줌마의 결혼식에 가지 못한 것과 외삼촌의 성취 사이에는 모종의 연관성이 숨겨져 있는 거라고. 그런 내 추측은 막연하고, 누군가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면 금방 철회하고야 말 연약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네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