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발가락이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미세하게 불편하여 구두를 벗고 보니, 오늘 신은 살색 양말스타킹 이음솔 부분에 작은 구멍이 나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중. 들어가서 양말을 바꿔 신을 시간 여유가 안되어 뭐 괜찮겠지 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학교에 와서 실내화로 갈아 신어 보니, 오른쪽 엄지발가락 부분에 구멍이 아까보다 커져 있었다. 아무도 내 발은 보지도 않을 테고 위에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위치인데도 누가 나를 보면 발가락만 보는 것 같아서 자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게 되었다. 자꾸 꼼지락거려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구멍에 두 시간 여가 지나고서는 발가락을 아예 빼보았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시원하게 바람을 쏘이자 이제야말로 목이 턱 막히듯이 오른쪽 엄지발가락 목이 딱 걸려서 더없이 불편했다. 이 작은 구멍 하나가 주는 거대한 이물감이라니. 결국 이상하긴 해도 오른쪽 양말을 벗어버렸다. 살색 양말스타킹이라서 잘 보이지도 않는 왼쪽과 오른쪽 발의 차이였지만 양말을 벗은 오른발은 마치 옷을 벗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민망함을 주었다. '내일부터는 가방에 여분 양말을 하나 넣어두어야겠다.' 다짐을 하며 자연스럽게 떠올린 건 남편의 발이었다.
발볼이 거의 없는 길쭉한 발. 엄지발가락이 유독 길어 보여서 내 손과 비교해 보니 남편의 엄지발가락은 내 새끼손가락과 길이가 같았다. 그렇다, 남편은 왕발이다. 신혼 때, 부부가 손잡고 주말이면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자주 카트에 담는 물건은 양말이었다. 결혼 전에 나는 뭘 신고 다녔지? 나도 분명 양말이나 무언가를 발에 걸치고 다녔을 텐데 나는 양말을 산 기억이 없다. 엄마가 넉넉히 사두셨다며 나눠주시거나 필요하면 슈퍼에서 스타킹을 사서 신는 정도의 의미 없는 쇼핑이라 기억에 없다. 하지만 결혼하고 함께 간 마트에서 남편은 자주 양말을 카트에 담곤 했다. 내가 아는 양말은 길에서 네 켤레 만원, 다섯 켤레 만원에 파는 그런 양말들. 하지만 남편이 마트에서 담는 양말은 가격도 저렴하지는 않아서 나는 속으로 종종 '아니 무슨 양말을 또?' 하며 불평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말 또 사? 지난번에도 샀잖아. 당신은 무슨 양말을 그렇게 사는 거야?"하고 물었다. 남편 말이 자기는 발이 커서 그런지 구멍이 자주 나서 양말을 종종 못쓰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엥? 요즘 양말 질 좋지 않나, 요즘에도 양말에 구멍이 난다고? 의아했다. 내 머릿속에 구멍 난 양말은 80년대쯤, 집집마다 바느질 쌈지통이 기본으로 갖춰져 있고 여차하면 손 바느질 몇 땀으로 단추도 달고 구멍도 메워 입던 그 시절에나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2007년 우리 집에 구멍 난 양말이라니. 집에 와서 남편의 서랍을 함께 열어보니 과연 바닥이 닳아서 구멍 나기 일보 직전인 양말들도 몇 켤레, 구멍이 나서 치워두어서 인지 짝 잃은 양말들도 몇 켤레나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양말이 닳아?" 나는 너무 놀라서 대뜸 물었다. 남편의 설명에 의하면 양말은 기성품이니 보통 사이즈의 발에 맞추어 나왔는데 남편은 발이 크다 보니 양말이 내내 늘어나 있는 상태이고, 그러다 보니 잘 닳는다고 했다. 구멍이 나거나 닳은 양말을 신고 직장 동료들과 신발을 벗는 식당이라도 갈라치면 들킬세라 불편해서 자기는 먼저 사서 바꿔둔다고. 그러고 보니 지난번 양말을 사러 홈플러스에 갔을 때, 천장에 걸린 광고판이 머리를 쳐서 다칠 뻔했는데 민첩하게 피해서 다행히 다치지 않았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163cm에 옷은 55나 66, 보세 프리사이즈 옷이면 대충 다 맞고, 신발도 240. 모든 것이 비교적 평균인 체형이다. 물건을 살 때도 신발이나 옷을 살 때도 특별히 사이즈로 인한 불편함은 없는 편이다. 남편은 키가 184cm이다. 키는 비정상적으로 크지 않지만 팔다리가 긴 체형이라 키에 맞춰 옷을 사면 허리가 크고, 사이즈에 맞게 옷을 사면 팔다리 길이가 짧기 일쑤다. 그래서 인터넷 쇼핑을 하면 반품하기 일쑤라 그냥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옷을 사는 사람인데 옷은 그나마 선택권이 많은 편이다. 운동화나 구두는 정말이지 찾기가 어렵다. 운동화는 직구를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사이즈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마침 괌에 여행갔을 때는 드디어 남편 발에 맞는 신발이 많아서 작은 캐리어 하나는 남편의 신발을 몇 켤레 담았었다. 국내에 나온 신발들 중 마음에 드는 디자인은 대부분 280까지만 출시되고, 그 이상의 사이즈는 디자인이 별로거나 안 팔려서 남은 신발들이 대부분이다. 신발이 필요해 백화점 쇼핑을 가면 남편은 결국 디자인이 아니라 300 사이즈 신발들을 보여달라고 한 후 그중 디자인을 고르는 게 나았다. 그것도 디자인이 별로라 결국 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혼을 하면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이제 내가 타인과 함께 사는구나를 느끼지만, 나는 구멍 난 양말과 300 사이즈의 운동화로 절감했다.
몇 년 전, 이사를 하면서 남편방을 꾸미고 붙박이장에 남편의 옷을 모두 정리하고, 안방 서랍장에는 내 옷과 아이들 옷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하지만 안방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남편이 거실을 지나 자기 방에 있는 붙박이장에서 옷을 꺼내입는 건 불편해 보여 올봄, 서랍장 정리를 하면서 남편에게 통 크게 서랍 두 개를 내주었다. 사실 서랍 여섯 칸 중 잡동사니 정리 두 칸, 아이들 잠옷이며 내복 한 칸, 내 잠옷과 내복 한 칸을 배치하고 남편에게 두 칸이나 배치한 것은 좀 과하다 싶었지만 이사하고 근 5년을 불편하게 살았을 남편을 위한 배려였다. 서랍 하나에는 속옷을, 하나에는 양말을 정리해 주고 이제 이렇게 정리하라고 알려주었다. 자기 옷을 차곡차곡 정리할 공간이 생겨 신이 난 남편은 다음 날부터 양말 쇼핑에 나섰다. 정장용 양말, 스포츠 양말, 단목 양말은 옷에 따라 달리 입을 수 있게 베이지색, 흰색, 검은색 다양하게 그리고 겨울용 울 양말.. 종류도 다양한 양말들이 계속 배달되어왔다. 그 큰 서랍 하나를 양말장으로 사용하면 여유롭고 단정하게 정리할 수 있겠지 싶었던 나의 생각은 짧았다. 나는 얼른 서랍 정리함을 사서 섞이지 않게 섹션을 나눠주었다. 신이 난 남편은 양말을 잔뜩 잔뜩 주문했고 급기야 나는 웃음이 나서 "여보, 당신 무슨 양말 성애자 같아. 양말 수집해?" 하고 물었다. 푸하하 크게 웃은 남편은 지난 주말에도 아이들에게 여름 양말 신을 건 있냐고, 서랍 한 번 보자고 아이들 양말을 정리하고 또 아이들을 위한 양말쇼핑을 했다. 성장기라 키도 발도 쑥쑥 크는 아이들에게 양말과 신발을 철마다 사주는 것도 남편이다. 중2 큰 아이는 여자아이인데도 아빠 닮아 그런지 발이 어느새 255이다.
그런 남편과 함께 살면서 내가 고치지 못한 남편의 습관이 하나 있다. 십 수년을 질색하며 양말은 세탁기에 넣으라고 적어도 식탁에 올려두진 말라고 싫은 소리도 해보고 웃으면서 잔소리도 해보았지만 고쳐지지 않는 습관. 밖에 나갔다 오면 홀랑 벗은 양말을 식탁에 올려두는 습관. 왜 고쳐지지 않을까. 왜 하필 식탁에 올려둘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테리.
오늘도 식탁 위에 남편의 양말이 올려져 있다. 아침에 모두 잠든 틈에 자기 차를 세차하고,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오전엔 동네 산책을 하고, 오후엔 모두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다녀오자마자 다시 또 혼자 나가 내 차를 세차하고 목욕까지 하고 돌아온 남편의 발을 보호해주었을 양말. 장보고 와서 피곤한데 다시 세차하러 나간다는 남편에게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전생에 한량이었나봐. 아무것도 안해서 이번 생에 남들보다 두 배의 일을 해내며 사는 것 같아."
함께 보낸 세월만큼 우리 사이에 더께가 쌓여서인지 남편의 양말이 애처롭다. 양말 성애자로 서랍이 넘치도록 양말을 수집해도, 식탁에 나란히 눕혀두어도 남편의 양말이 오늘도 포근히 그의 발을 감싸주길, 그 사람을 보호해 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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