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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일기

(에세이쓰기) 일상의 낱말들 #3. 밥

by 히파티아햇살 2023. 6. 8.

밥,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엄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차려주시던 밥상에는 다양한 야채가 많았다. 여름이면 집 근처 어딘가 놀고 있는 땅에서, 이모네 텃밭에서 갓 따온 상추며 깻잎은 언제나 밥상 위에 있었고 퉁덩 퉁덩 대충 자른듯한 오이는 더욱 먹음직스러웠다. 아직 물방울을 매달고 있는 매운 청양과 풋고추 옆에 어슷어슷 잘린 양파 또한 아삭했다. 엄마의 밥상은 여름맛이었다. 내가 다 자라고 나서 집을 떠난 지 점차 오래되어 엄마의 밥상 맛이 희미해지고 또 희미해지다가도 엄마네 집 부엌에 가면 어린 시절 밥상이 또렷이 살아났다. 밭에서 따온 고추를 씻고 다듬어-이 과정이 얼마나 고통인지 나중에 아주 나중에, 광주리 가득하던 엄마의 고추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적은 양, 마트에서 파는 한 봉지의 꽈리고추를 다듬으며 깨달았다.- 한참을 지글지글 기름에 볶다가 멸치와 간장을 넣고 조려낸 엄마의 고추 조림은 말 그대로 엄마 맛이었다. 식구들은 엄마가 마음먹고 한 광주리 가득 고추를 씻기 시작하면 온 집안에 매운 내가 진동하는 것을 못 참아하며 기침을 해대고 힘들어했지만 엄마가 밥상에 올려둔 고추는 몇 개씩 한꺼번에 집어 입에 넣곤 했다. 엄마의 깻잎 김치는 어떻고. 갓 지은 밥에 적당히 익은 깻잎 김치를 하나 턱 얹어서 감싸 먹으면 밥 한 그릇 뚝딱은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자주 가지 못하는 친정 발걸음에 아쉽고 죄송해 전화를 하면 엄마는 약 올리는 말투로 엄마는 지금 닭 볶음해서 묵은지랑 밥 먹으려고 차리지롱~ 하고 웃었다. 엄마의 밝은 목소리 뒤에 함께 먹고 싶은 마음을,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면 부담스러울까 우스갯소리처럼 넘기는 마음이 보였다. 그리고 엄마네 집에 엄마가 차려낸 밥상이 만들어내는 풍경도.

 

 이십 여년 만에 고등학교 때 동창 넷이 모였다. '어머, 너는 하나도 안 변했다, 얘.'로 시작하는 중년의 여성들의 대화. 내가 어디 카페에 앉아있을 때, 할머니들끼리 만나도 종종 하는 대화였으므로 나는 이런 대화로 시작하는 오랜 인연과 만나는 이 첫 대화들이 어서 지나가길 바라지만 언제나 오랜 친구들은 서로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세월만큼 벌어진 서로의 삶의 간극. 대화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로 향한다. 그때 그 시절 우리가 함께하던 시절로. 야자 시간에 몰래 나가 잠깐잠깐 놀던 일, 그러다가 학생 주임 선생님께 걸려서 혼나던 일, 축제 날 계란에 그림 그리던 풍경, 푸근하고 인자하시던 신부님과 지금도 하얀색이 먼저 떠오르는 수녀님. 교과 내용이라서 시를 읽어주시는 목소리가 그만 너무 멋져서, 여러 여고생들의 마음을 훔쳐가셨던 문학 선생님. 가을, 학교 인근 몇 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 공원에 나가 한없이 쏟아지는 은행잎 아래에서 시 수업을 듣던 우리들. 도대체 아무 소리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욕쟁이 물리 선생님은 우리가 못 알아듣는 건지 본인이 어렵게 가르치는 건지 헷갈리시고 다만, 본인이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물리를 어려워하며 대부분 엎드려 대놓고 자던 우리에게 갈수록 심한 욕을 퍼부으셨었지. 학교 이야기, 선생님들 이야기를 돌아 돌아 주말이면 우리 종종 나가 공부하던 이야기를 했다. 그 무렵 나는 학교를 너무 좋아해 일주일에 7일을 학교에 나갔다. 토요일 오후에 모두 집에 가고 난 후 빈 학교가 좋았고, 일요일이면 마치 학교가 모두 내 차지인 것처럼 학교 이곳저곳 중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 앉아 공부를 했다. 옥상에 책상을 옮기고 햇볕을 쪼이며 공부를 하던 그런 나날들. 그때의 햇살과 햇살 아래 나를 회상하며 한껏 감상에 젖어있는데 친구가 그런다.

 "야, 너 양푼 기억나?"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나를 제외한 두 친구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맞아, 그 상추도!"

 "햇살이 아주 맘 먹고 다 챙겨 왔잖아. 상추에 깻잎에 참기름 뿌린 고추장까지! 계란 프라이도 몇 개씩 해오고."

 "그 양푼 진짜 컸는데. 거기다 우리 각자 가져온 흰 밥 모두 붓고 섞어서 먹으면 진짜 맛있었잖아."

 "야, 밥보다 상추가 더 많았어. 무슨 야채를 그렇게 많이 넣었는지. 그래서 그 상추 먹어서 밥 먹고 내가 졸았나.."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햇살이는 나였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친구들에게는 흰 밥 자기가 먹을 만큼씩만 싸 오라고, 나머지는 내가 들고 간다고 바리바리 싸들고 학교에 가던 열일곱 살의 나.

주말에 학교에 공부를 하러 가는 거니까, 고등학교 2학년 나름 입시에 가장 중요한 시절을 통과하던 나니까. 밥 정도는 학교 앞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 사 먹어도 되었을 텐데. 굳이 싸가서 먹고 싶으면 내가 먹을 도시락 싸가서 먹으면 되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모두와 함께 싱싱한 야채를 잔뜩 넣은 비빔밥을 먹겠다고 나섰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그게 나인 것 같으니까. 나에게 어울리는 모습인 것 같으니까.

 

얼마 전, 아이들이 어릴 때 사진첩을 오랜만에 펼쳤다. 큰 애 여섯 살, 둘째 세 살 무렵의 사진. 이 때는 내가 두 아이를 직장 어린이집에 데리고 다니던 시절이다. 이 시절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남편은 잘 보이지 않고 마치 셋이 지냈던 것처럼 우리 셋만 선명하다. 아침에 일어나 두 아이를 씻기고 먹을 것을 챙겨서 차에서 먹이면서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퇴근하면 1분이라도 늦어질세라 운전을 거칠게 해서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던 시절. 다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그제야 안심이 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 나는 어린이집 근처 놀이터에서 놀거나 집에 오자마자 집 근처 공원에 저녁 먹을 것을 싸 들고나가 두어 시간을 놀리곤 했다. 그 시절의 어느 하루. 퇴근하고 아이들과 공원에서 놀고 집에 들어와 아이들 씻기고 탕 목욕하는 동안 차린 밥상을 아이들에게 내준 날. 밥상이 만족스러워 신나게 먹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찍은 사진이었다. 밥상에는 각종 쌈 채소와 살짝 찐 양배추, 시금치 무침, 콩나물 무침, 멸치조림이. 그리고 된장국이 있었다. 또, 고등어구이도. 아이들이 제법 자란 요즘의 우리 집 밥상은 이제 거의 한 그릇 음식들로 채워지는데 그때는 아이들 복닥복닥 정신없었는데도 어쩜 저랬지.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놓고 아이들을 먹였네. 그 조그만 뱃 고래에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나도 반찬 그릇 거의 그대로였을 것 같은데 말이지.. 나 왜 그랬지. 아, 그런데 그게 나인 것 같다.

 

그 사람이 먹은 것이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엄마의 야채를 먹고 이렇게 야채를 챙겨 친구들과 나눠 먹는 아이로 자라고, 딸들에게 야채로 가득한 한 상을 차리는 엄마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직 중학생인 내 딸이 나의 키를 추월해 자란 날부터 내 마음 속 딸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이제는 나를 내려다보는 아이, 이제는 나를 감싸 안아주는 아이에게 여전히 내가 엄마로서 어른으로서 이야기를 하기에는 뭔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었다. 이 아이는 친구들에게 어떤 친구일까. 

 

 며칠 전, 반찬이 하나도 없는데 아이가 배 고프다고 하여 잠깐만! 하고는 냉장고를 뒤졌다. 최근에 장 본 것도 없어서 무슨 음식을 해야 할 지 머릿속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30분 뒤, 식탁 위에는 카레와 짜장, 김치찌개, 오이 탕탕이, 두부조림과 된장국이 차려졌다. 예전에는 이렇게 밥을 차리는 것에 의미를 두지도 않았고 나의 음식, 내가 해내는 음식..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뚜렷한 가치관도 없는 그냥 하다 보니 늘어난 음식  실력으로 그냥저냥 먹고사는 그런 음식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30분 사이 몇 가지의 음식을 뚝딱 해냈던 며칠 전 그날, 비로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창의성을 발휘하는 일이라고, 엄마의 음식이 나를 만들었 듯, 내 음식도 우리 아이들에게 각인된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딸들은 내 음식을 뭐라고 기억할까. 맛이 아니어도 엄마의 마음은 선명히 기억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