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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일기

눈부신 안부-백수린, 문학동네

by 히파티아햇살 2023. 6. 7.

백수린 작가의 책, <여름의 빌라>, <친애하고 친애하는>을 너무 좋아서 두 번씩 읽었다.

그런 백수린 작가님이 이번에는 처음으로 장편소설을 쓰셨다고 하여 잔뜩 기대했는데 마침 또, 문학동네 북클럽 이달책에 선정되어 있길래 바로 주문했다. 

 

표지 디자인도 너무나 예쁜 백수린 작가님의 신작, 눈부신 안부.

재미있는 소설을 읽다보면 페이지가 훅훅 지나가 있는데 반해, 이 책은 내용에 푹 빠져 읽고 있는데도 페이지가 근처에 자꾸 머물렀다. 

밀도가 높은 단편을 써오던 분이라, 한 문장 한 문장에 꾹꾹 눌러 담으신 걸까. 문장들이 좋아서 자꾸만 멈춰서 다시 읽고, 다시 읽었다. 오늘 작가님의 인스타 라이브 방송을 들었는데, 단편을 쓰실 때는 내용을 늘려가더라도 결말까지 꽉 짜고 나서 세세하게 쓰는 반면 눈부신 안부는 연재이다 보니 그럴 수가 없어서 어떻게 끝날지 본인도 두려워하며 쓰셨다는 말씀에 마음이 짠해졌다.

얼마 후에 이렇게나 멋진 책이 결과물로 나온다고, 결국 이렇게 해낼 것이라는 것을, 과거의 작가님께 달려가 속삭이고 책의 표지를 보여드리고 싶은 기분.

'파독 간호사'라는 단어에 끌려 결국에 만들어내고 만 서사.

주인공 해나가 어린 시절의 아픔을 딛고 성장해나가는 모습, 조금 느리지만 한 걸음씩 옮겨가는 모습을 응원하며 읽었는데 마지막 한 줄이 아주 멋진 마침표였다.

개인적으로 작가님이 내내 어떻게 끝날지 걱정하셨다는 게 무색할 만큼이나 완벽한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좋은 소설을 읽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레이어가 한 겹 더 생기는 것 같다.

세상 어딘가에 이런 사람들이 자기만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기를 바라게 되는 마음.

이런 이모가 있기를 바라기보다는 이제는 내가 이런 어른으로 내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머물러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지. 하지만 나도 그냥 어린아이로 이런 이모와 한없이 대화하며 강변을 걷고, 마지막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으며 밤바람 속에 앉아있고 싶어지는 마음.

요즘처럼 완벽한 밤공기라면 더할나위없겠지.

좋은 책을 읽어서 읽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p.40.

 

 

침대에 드러누운 뒤 이모가 알려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찾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낮게 시작하다가 점점 고조되는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들려왔다. 가사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도, 곡을 끝까지 듣고 나자 이것이 누군가를 위한 기도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토록 슬프고도 아름다울 리가 없었으니까. 나는 정적 속에서 천장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반복재생 버튼을 눌렀다. p.49

<망연히>와 같은 부사의 적절한 쓰임이 백수린 작가님의 강점이 아닐까.

 

 

나는 어른들의 사정을 다 알았지만 어른들은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오힐 너무 많은 상상을 멈출 수 없고 그래서 괴롭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p.50

 

 

나에게는 언니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기회가 더 이상 없는데 한수에게는 남아 있다는 사실에 불쑥 화가 났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한없이 서글퍼졌다. 여네 살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도 적어도 나만큼은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건 내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한 내 안의 악의였다. p.66
언니, 사람의 마음에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p.109


이모와 하는 마지막 산책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모가 돌아가도 이모를 생각하며 혼자 동네를 걸어야겠다고 말하자 이모는 "그래,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몸을 조금이라도 쓰면 인생이 살 만해져."라고 말했다.  p.214

 

 

이모가 손을 뻗어 내가 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모의 손길이 닿자, 나는 오래전 이모의 집 거실에서 있던 어린아이가 되어 이십 년이 훨씬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전히 언니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 때가 있다고. 상실 이후 시간이 때때로 선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쳇바퀴를 돌듯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p.227

찬란히. 역시 부사가 좋다.

 

 

침대 시트까지 걷어내어 이불 빨래를 돌리고, 집 밖을 벗어나 한낮에 사람들 사이를 걷는 것. 규칙적으로 일상을 살아내는 것. 별것 아닌 일들이지만 다시 그럴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238

 

 

그런데 오늘 아침에 침대에 누운 채 추크슈피체의 별이 쏟아지던 풍경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네가 과학 시간에 배웠다며 오래전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더라. 개개의 인간들의 몸을 구성하는 아주, 아주 작은 요소인 원자는 멀고도 먼 옛날 폭발한 어느 별에서 왔다는 말. 기억나니? 이런 기억들은 대체 어디에 있다 튀어나오는 걸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새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아무튼 오늘 아침엔 그 말을 곱씹어보다가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단다. 우리는 모두 그 자체만으로도 태초의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존재들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말이야. p.302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p.303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p.304